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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독립은 연합국이 준 선물인가? 본문

역사이야기

우리나라의 독립은 연합국이 준 선물인가?

케렌문 2025. 8. 31. 08:51

일본은 태평양전쟁에서 패색이 짙어지자 한반도를 제외한 다른 모든 점령지를 포기하는 조건으로 종전을 하고자 했으나, 미국으로부터 원자폭탄 두 방을 맞고 1945년 8월15일 일본 천황 히로히토가 라디오 방송을 통하여 연합군의 요구조건을 담은 포츠담 선언을 수락한다고 발표하였다. 이로써 한국은 만 35년간의 식민 지배에서 벗어나 광복을 맞게 되었다. 
혹자는 한국의 독립이 연합국의 승전으로 받은 선물이라고 말하지만, 한국의 독립은 가만히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하늘로부터 떨어진 로또가 아니다. 과연 일본의 패망으로 한국의 독립이 저절로 얻어진 것일까? 지금부터 그 비하인드 스토리를 파헤쳐 보자. 

카이로선언

한국의 독립이 처음으로 거론된 것은 카이로선언이다. 1943년 11월27일 미국의 루스벨트, 영국의 처칠, 중국의 장제스 3국 정상이 이집트 카이로에서 회담을 하고 카이로선언을 발표하였다. 이 카이로선언에 한국의 독립 보장 내용이 특별조항으로 들어가 있다. 카이로선언의 주 내용은 '일본은 1914년 세계 제1차 대전 개시 후 점령한 영토를 반환한다.'라는 것이다. 한국은 1914년 이전에 이미 일본에 합병되어 일본의 영토가 되었으므로 반환 대상의 영토가 아니다. 영일동맹으로 일본의 한국 지배에 일조하였던 영국은 그 회담에서 처칠이 이 조항을 들어 한국의 독립을 반대하였지만, 중국의 장제스가 한국의 독립을 강하게 주장하여 특별조항으로 '한국을 적당한 시기에 독립시킨다.'라는 조항을 넣게 되었다. 이때 장제스의 노력이 없었다면 공동선언에 특별조항이 들어가지 못했을 것이고 한국은 일본의 패망에도 불구하고 독립되지 못했을 것이다. 

상해 임시정부의 활동

장제스가 한국의 독립을 강하게 주장한 데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외교적 노력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1. 윤봉길 의사의 의거 
장제스는 처음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았고 독립에 대해서도 우호적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1932년 이봉창, 윤봉길 의거 사건을 계기로 임시정부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다. 윤봉길 의거 소식을 접한 장제스 주석은 "중국의 100만 대군도 하지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해냈다!"라고 탄식하며 윤봉길 의사의 숭고한 희생정신에 깊이 감동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침체기를 벗어나 독립운동의 활로를 모색하는 데 결정적인 전환점이 됐다. 임시정부는 장제스 주석의 지원을 바탕으로 중국 관내에서 독립운동의 역량을 강화하고, 광복군 창설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중국 장제스 주석을 감동하게 해 결정적으로 카이로선언을 이끌어 내도록 계기를 만들어 낸 윤봉길 의사야말로 우리 민족사에 길이 빛날 독립 영웅이다.

2. 김구, 이승만의 활약
카이로선언 전에 김구, 김규식, 김원봉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장제스에게 한국 독립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장제스의 도움을 구했다. 한국 독립에 소극적이던 장제스가 윤봉길 의거를 계기로 마음이 돌아서 임시정부에 대한 지지를 보내고 지원을 약속하였다. 한편 2차대전 중 임시정부 주미외교위원 부위원장으로 활동하던 이승만은 루스벨트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카이로선언에서 루스벨트의 지지를 끌어냈다. 카스라 태프트 밀약으로 일본의 한국 지배를 용인한 미국은 애초 한국의 독립에 관심이 없었지만, 카이로선언에서 장제스의 한국 독립 주장에 대해 처칠은 강하게 반대하였지만 루스벨트가 반대하지 않은 것은 이승만의 활약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40년 한국광복군을 창설하고 연합국의 일원으로서 일본과 싸우겠다는 의지를 밝히고 1944년 말부터 미국 OSS와 협약을 맺고 중국 시안 등에서 다양한 전술을 포함한 특수훈련에 돌입했다. 1945년 초 미국 OSS의 엄격한 시험에 통과한 광복군 대원들은 연합국의 일원으로 8개 팀으로 나눠 국내진공작전을 준비하였다. 하지만 8월15일 일본이 항복하는 바람에 이 작전계획은 무산되고 말았다. 일본이 조금만 더 늦게 항복하였다면 이 작전은 실행되었을 것이고 한국은 당당히 연합국의 일원으로 승전국이 되었을 것이다. 

민족의 저항정신과 광복군의 활약

우리나라는 일제 치하 35년 동안 기미 삼일 독립운동을 비롯하여 독립투사들이 국내외에서 가열찬 투쟁을 벌였고 만주에서는 광복군이 일본군과 직접 전투를 벌이는 무장투쟁을 하였고 최후의 독립 작전으로 한반도 내 일본군을 몰아낼 진공 작전을 준비하기도 했다. 역사적으로 한민족은 외세의 침략에 대해 쉽게 굴복하지 않고 끈질기게 저항해 왔다. 이러한 저항정신이 한국은 힘으로 굴복시킬 수 있는 나라가 아니라는 것을 세계만방에 각인시켰다. 만약 한국이 침략자에 대한 저항정신을 놔버리고 일본의 지배에 순종했다면 과연 연합국이 한국을 독립시킬 생각을 했을까? 

이러한 우리 민족의 독립에 대한 열망과 독립투사들의 투쟁과 광복군의 활약을 폄하하고 단지 연합국의 승전과 일본의 패망으로 독립이 저절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을까?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노력이 없었다면, 어쩌면 일본의 패망에도 불구하고 한국이 독립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참고 
일본 천황의 항복 방송문 어디에도 항복이란 단어가 없다. 타국을 침략한 것도 천황의 뜻이 아니라고 변명하며, 오히려 미국이 잔혹한 폭탄을 사용하여 무고한 사람들을 살상하는 참해를 벌이는 일로부터 백성을 보호하고 국체 보전과 평화를 위해 선언을 수락한다고 하였다. 침략에 대한 반성은 없고 철저히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면서 평화를 위해 종전한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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