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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 이야기
우리가 초등학교때 '자유통일 위해서~' 노래를 부르면서 청룡부대,맹호부대,백마부대의 월남 파병을 통해 베트남전쟁을 자유수호를 위한 전쟁으로 배웠다. 과연 베트남전쟁은 공산주의 침략에 맞서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싸운 정의의 전쟁일까? 베트남전쟁의 진실을 알아 보자. 1945년 일본이 패망하자 '호치민'은 '베트남민주공화국'을 세우고 미국에 전문을 보내 미국이 승인해 주기를 희망하였다. 일본과의 독립전쟁시 미국이 호치민을 적극 지원하였기 때문에 당연히 승인해줄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여러차례 전문을 보냈음에도 호치민은 미국으로부터 아무런 회신을 받지 못하였다. 한편, 프랑스는 베트남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고 다시 식민지배 하고자 하였고, 이에 호치민은 또다시 프랑스를 상대로 독립전쟁을 벌였다. 1954년 '디..
대병면 장단리에 사는 정태섭은 독립선언서 5백매를 가져와 합천군내 각면에 배부하여 민중들을 독립의거로 궐기케 하는데 공헌했다. 3월 초순 이곳 대병면에 사는 임상종도 서울에서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임상종은 곧 지방 유지를 초청하여 독립선언서를 보이고 거사를 협의했다. 이에 따라 권영두·권중박·정시권·류인수·권양희·송헌기 등은 거사일을 3월 20일 창리 장날로 약속 했다. 이들은 역평리에서 선언서를 등사하고 크고 작은 태극기를 만드는 한편 각 마을을 순방하면서 대중 동원을 위한 작업을 서둘렀다. 1919년 3월 20일 창리 장날 오후 1시, 장에 모인 군중은 약 4천명이 되었다. 권영두의 연설에 이어 선언서·태극기가 배부되고 큰 태극기를 높이 세운 가운데 주동인물들의 선창에 따라 독립만세..
의종때 문극겸의 환관에 대한 탄핵기록 (고려사 절요) 1161년 의종17년 8월에 좌정언 문극겸이 합문에 엎드려서 상소를 올려 말하기를, "환관 백선연이 상벌의 권력을 함부로 행하고, 은밀히 궁인 무비와 추행이 있었으며, 술객 영의는 좌도를 가지고 위에 아첨하여 백순.관북의 두 궁을 설치하고, 사사로이 재화를 저축하여 복을 빌고 재를 올리는 비용을 지출하며, 백선연과 더불어 사무를 관장하면서 무릇 양계의 병마사와 오도의 안찰사가 대궐에 하직하고, 떠나는 날에는 반드시 두 궁에다 잔치를 벌여 위로하고 전송하여, 그들로 하여금 각각 방물을 바치게 하고, 그 바쳐온 물품의 다소에 따라 전최를 삼음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가가 호호에 추렴하기에 이르게 하여 민원을 초래하였고, 좌상시 최유칭은 중요한 직위를 맡아 ..
삼국지연의를 접한 많은 사람들이 제갈량의 신들린 전략에 감탄하지만, 사실 제갈량이 노련한 재상, 행정가의 이미지도 겸비한 반면 법정은 그야말로 진짜 천재 전략가이자 작전참모 이미지에 가까웠다. 후에 정사 삼국지의 편찬자인 진수가 방통과 법정에 대하여 평하기를, 방통은 순욱과 막상막하며 법정은 정욱, 곽가에 비견된다고 하였다. 당장 한중전투만 보아도 유비는 오히려 제갈량을 성도에 배치하여 후방 지원을 맡게 했고, 법정은 전선의 핵심참모로 기용했다. 제갈량 역시 법정을 매우 높게 평가하여 후일 법정이 살아만 있었더라도 이릉의 대패는 없었거나 설령 패배했더라도 이 정도로 크게 패하진 않았을 것이라고 탄식했을 정도니 그의 지모가 어느 정도 수준이었는지는 알 수 있다. 실제 제갈량이 연의에서 보여주는 비범한 군..
조선 세종에 버금가는 성군의 자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가장 저평가된 왕이 세종의 아들 문종이다. 문종은 아버지 세종을 닮아 학문을 좋아했고 학자(집현전 학사)들을 아끼고 사랑하였다. 문종은 뛰어난 능력으로 많은 업적을 남겼지만, 그가 정말 위대한 점은 인격적인 면이다. 실제로 문종이 사망했을 때, 세종의 상사보다도 백성들과 신하들이 더 슬퍼했다고 한다. 보통 대단한 천재들은 상대방을 무시하고 자신만이 옳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한데, 문종은 정반대로 항상 자신의 덕이 부족해서 실수할 수 있으니 신하들에게 간언하기를 소홀히 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이 또한 말이 아니라 실천으로 보여줬는데, 세종이 4품 이상 관리들에게 "윤대"를 허용한 것을 6품이상으로 확대한 것이다. "윤대"란 독대를 말하는데..
1,500년 로마제국 황제 138명 중 -암살 또는 피살 : 42명 -자살 : 5명 -처형 : 13명 -옥사 : 1명 -전사 : 12명 -중독사 : 1명 -사고사 : 3명 -과로사 : 1명 -자진퇴위 : 2명 -폐위 :3명 -열받아 죽은 황제 : 1명 -비정통 황제 : 2명 -자칭황제 : 1명 -공동황제 : 9명 -평민출신 황제 : 1명 -노예출신 황제 : 1명 -사병출신 황제 ; 1명 -아랍출신 황제 : 1명 -로마 멸망 후 명목상 황제 : 3명 -황제가 아닌 왕 : 1명(서로마제국을 멸망시킨 게르만 용병대장 오도아케르) -최초 로마 건국자 : 로물루스 -로마제국 초대 황제 : 아우구스투스 -서로마 마지막 황제 : 로물루스 아우구스투스 1946년 이탈리아 공화국이 수립된 이후 -75년간 바뀐 정부가 ..
조선 가장 비운의 왕비는 누굴까? 원경왕후 민씨 (태종비) 남편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는데 일조한 여장부였지만 말년에 남편 태종과의 사이가 나빠져 사랑도 잃고 남동생 네 명도 남편에 의해 잃고 그로 인해 어린 딸마저 불행한 삶을 살게 한 비운의 왕비였다. 소헌왕후 심씨 (세종비) 세종이라는 성군을 만나 왕비가 되었지만 왕비로서의 삶이 참 고달펐다. 시어머니 원경왕후 집안이 태종에 의해 작살난 것처럼 소헌왕후 자신 집안도 풍비박산났다. 아버지 심온이 역적 누명을 쓰고 죽었고 어머니와 형제들이 관노가 되거나 귀양을 갔다. 역적의 딸이니 폐비시켜야 한다고 했지만 다행히 폐비는 되지 않았다. 이는 외척 제거라는 태종의 당초 목적이 달성되었기 때문에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정순왕후 송씨(단종비) 단종과의 짧은 ..
조선에서 가장 비운의 공주는 누굴까? 경순공주 (태조 이성계의 딸) 이성계의 딸로 태어나 조선 개국 공신인 이제와 혼인하였으나 제1차 왕자의 난 때 남편인 이제와 동생 방번, 방석이 모두 죽고 아버지 태조에 의해 비구니가 되어 출가하여 쓸쓸히 살다간 비운의 공주 정선공주 (태종 이방원의 딸) 태종과 원경왕후의 딸로 태어났으나 태종과 원경왕후의 사이가 나빠서 출생기록도 없고 아버지 태종으로부터 외면받았고 남편인 남휘의 방탕한 생활로 남편으로부터도 사랑받지 못하고 힘든 세월을 보내다 21세의 어린나이에 세상을 떠난 비운의 공주 경혜공주 (문종의 딸, 단종의 누이) 문종과 현덕왕후의 딸로 태어나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고 15세의 나이에 정종(鄭悰)과 혼인하였다. 계유정난과 단종복위사건으로 동생 단종이 영월에서 ..
민족자주사학자 문정창 선생이 에서 그 원인으로 10대 수난사를 적절히 적었던 바,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 고구려 동천왕 20년(246년) 위나라 장수 관구검이 고구려 수도 환도성을 공략하여 많은 사서가 소각되었다. 2. 백제 의자왕 20년(660년)년 사비성(부여) 함락으로 사고가 소각되었다. 3. 고구려 보장왕 20년(668년) 평양성 함락으로 당나라 장수 이적이 역사 전적을 모두 탈취하여 갔다. 4. 신라 경순왕 1년(927년) 후백제 견훤이 경애왕을 치고 경순왕을 세우면서 신라의 사서들을 전주로 옮겼다가 고려 태조 왕건에게 토멸당하여 방화되고 소각되었다. 5. 고려 인종 4년(1126년) 사대주의자 김부식등이 금나라에 신하를 칭하는 표를 올린 후, 주체적인 사서들을 금나라가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