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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동과 선화공주의 사랑이야기 진실일까? 본문

역사이야기

서동과 선화공주의 사랑이야기 진실일까?

케렌문 2025. 3. 15. 10:05

 지난 2009년 1월 백제 무왕 때 왕비인 선화공주의 발원으로 지어진 것으로 알려진 미륵사의 서탑 사리봉안기에서 뜻밖의 유물들이 발굴되었다. 여기에서 미륵사를 창건한 사람은 백제 왕후인 좌평(佐平)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따님이라는 기록이 나온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무왕의 왕후는 당연히 선화공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좌평 사택적덕의 따님이 왕후라니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삼국유사에 기록된 서동과 선화공주의 사랑은 지어낸 허구일까?

 삼국사기에 선화공주에 대한 기록이 없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것은 삼국사기 특유의 서술방식에서 찾을 수 있다.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왕의 자식들을 따로 기록하지 않고, 왕의 부모를 항상 먼저 소개하고 있는데, 이러한 까닭으로 진평왕의 큰 딸인 선덕여왕과 김춘추의 어머니였던 둘째 딸 천명부인은 기록될 수 있었지만 선화공주는 기록되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 밖에 실제로 서동이 마를 캐던 지금의 김제 지역은 금(金)이 들어가는 지명이 많을 정도로 사금이 많이 나는 곳이다. 선화와 서동이 들렀다는 사자사도 실제로 존재한다. 현재 발굴된 미륵사의 구조는 3월 3금당으로 역시 기록과 일치한다. 무왕시대인 639년의 완성 사실 기록 역시 창건주체를 제외한다면 오히려 삼국유사 무왕조 기사의 신빙성을 높여주고 있는 것이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서동과 선화공주의 사랑이야기는 사실일까?  몇가지 사실을 가정해 보자.

[가정1] 선화공주는 제2왕비?

 서동이 제30대 무왕으로 등극과 동시에 추대한 귀족세력에 의해 당시 명문 귀족이었던 좌평 사택적덕씨의 딸과 정략 혼인하여 왕후로 책봉한 것이 아닐까? 서동은 그동안 쭉 사귀고 있던 신라 진평왕의 셋째딸 선화공주와의 사랑은 귀족들에 의해 강제로 끝을 맺었을 것이다.

그러다 무왕 재위 초기, 신라는 고구려로부터 공격을 받고 있었고, 무왕은 약해진 왕으로서의 권위를 외부에서 찾을 필요가 있었다. 결국 양국의 필요성이 맞아 떨어져 무왕과 선화공주의 정략결혼이 추진되었을 것이다. 과거 동성왕 때도 양국간 결혼을 통해 나제동맹을 맺은 전례도 있고....

실제 무왕 재위 42년간 12차례나 신라와 전쟁을 벌이지만 즉위년인 600년부터 611년 사이에는 두 나라 간에 단 한차례의 공격만 있었다는 것은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

결국 귀족들에의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왕으로 옹립되고 사택적덕씨의 딸과 강제혼인으로 사택씨가 왕후로 책봉되고 선화공주는 그 후 신라와의 정략결혼으로 이루어진 두번째 왕비가 아닐까?

[가정2] 선화공주 조기 사망?
 
 삼국유사에는 선화공주의 소원으로 연못을 메워 미륵사를 세웠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렇다면 무왕 초기에는 선화공주가 무왕의 정비인 왕후였을 가능성도 있다. 서동이 왕위에 오르기 전 이미 선화공주와 사실상 혼인관계에 있었을 것이다.

 귀족들에 의해 왕으로 추대될 때도 이미 결혼해서 살고 있는 선화공주를 귀족들은 신라와의 정략적 관계등을 고려하여 왕후로 인정했을 것이다. 무왕은 왕으로 등극하자 마자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익산을 새로운 발판으로 삼고 왕권을 강화시켜 나가기 위한 경영에 착수했을 것이고, 선화공주를 앞세워 미륵사 창건을 시작하였을 것이다.

 그러다가 무왕 재위 몇년 후 왕비인 선화공주가 죽고 (선화공주의 탄생연대는 대략 580년으로 추정하나 사망연대는 알 수 없음), 그 후임으로 사택적덕씨의 딸이 왕후로 책봉되어 무왕이 추진하던 미륵사 창건을 준공하고 서탑 사리봉안기에 왕후인 자신의 이름을 기록으로 남겼을 것이다.  

 일본서기에 의자왕의 어머니 즉 백제 무왕의 왕후가 642년에 죽게 되어 의자왕이 이를 계기로 귀족들의 대대적인 숙청을 하여 왕권을 강화하게 되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사택왕후의 죽음으로 그동안 권세를 누리던 귀족세력이 급격히 약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아무튼 서동과 선화공주의 사랑이야기는 허구가 아니라 사실일 것이고, 선화공주가 제1왕후든 제2왕후든 어떤 형태로든 무왕과의 혼인관계가 맺어졌을 것이다. 또한 조선시대와는 달리 삼국시대에는 정비인 왕후가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명일 수도 있다. 사택적덕씨의 딸이나 선화공주 모두 왕후로 책봉되었을 수도 있는 것이다. 미륵사에서 발굴된 유물로 인해 머리가 상당히 혼란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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