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저런 이야기
세계 곳곳에서 영국이 저지른 만행들 본문
흔히 영국을 신사의 나라라고 한다. 신사란 귀족은 아니지만 귀족에 준하는 젠트리 계층으로서 젠틀맨으로 불린다. 동양의 군자와 같은 개념으로 모범적인 사람을 뜻한다. 이름과 달리 영국은 역사적으로 모범적이지 않았다. 19세기 영국이 저지른 만행은 히틀러의 악행 보다 훨씬 많다. 세계 곳곳에서 발생하고 있는 분쟁에는 대부분 그 뒤에 영국이 있었다. 역사적으로 세계에서 빌런짓을 가장 많이 한 나라가 영국이다. 오늘날 영국이 괜히 혐성국으로 불리는 것이 아니다. 영국이 저지른 주요 악행을 살펴 보자.
1.노예무역
설탕 생산에 필요한 노동력 확보를 위해 아프리카 내부의 인간사냥과 영국의 노예무역이 시작되었다. 대서양을 횡단하는 흑인 노예선의 여정은 비위생적이고 열악한 환경으로 노예들을 짐짝 취급하여 운송 도중 많은 노예들이 목숨을 잃었고 그렇게 죽은 노예들은 그냥 바다에 던져버렸다. 노예는 인간이 아니라 팔기 위한 상품에 불과했다. 참혹한 환경 속에서 살아남은 노예도 지옥같은 삶을 살며 강제 노역에 시달려야 했다. 역설적이게도 1806년 영국은 세계에서 가장 먼저 노예무역을 금지했다. 자신들이 행한 노예무역이 너무나 비인간적이고 참혹했다는 것에서 일말의 양심의 가책이라도 느낀 걸까?
2.아일랜드 대기근
영국의 식민지였던 아일랜드는 영국의 가혹한 수탈에 못이겨 고통받고 있었는데 1846년 감자마름병으로 흉년이 들었을때 영국 정부의 대처 소홀과 방치로 당시 인구 1/4인 200만명 이상이 굶어죽었다. 1997년 블레어 영국 총리는 대기근 음악 추모제에 참석해 이에 대해 사과했다.
3.아편전쟁
영국은 청나라와의 무역적자를 메꾸기 위해 아편을 팔기 시작했고 1840년과 1856년 두 차례 전쟁까지 일으켰다. 인류역사상 가장 추악한 전쟁으로 평가받고 있다.
4.원명원 파괴
아편전쟁때 청나라의 원명원을 파괴하고 문화재를 약탈해 갔다. “어느 날 강도 두 명이 원명원에 들어가 한 명은 약탈하고 한 명은 불을 질렀다. 두 승자는 함께 원명원을 송두리째 파괴했다. 한 명의 강도는 영국이고 또 한명의 강도는 프랑스다” 빅토르위고는 이와 같이 비판하면서 서양에는 파르테논신전이 있고 동양에는 원명원이 있다고 할 정도로 원명원의 문화재 가치를 높이 평가했다.
5.보어전쟁
강제수용소를 세워 12만명 이상의 보어인을 강제 수용하고 약6만명이 도륙 당했다. 이 아이디어는 후에 나치독일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재활용되었다.
6.인도 수탈
18세기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영국은 식민지 인도에서 노동과 자원을 착취하고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 이 과정에서 인도인들은 극심한 착취와 강제노역으로 고통을 겪었다.
7.벵골분할령
1905년 영국이 식민지 인도에서 민족의 단합을 분열시키기 위해 벵골지역을 힌두교도가 많은 서벵골과 이슬람교도가 많은 동벵골로 분할함으로써 민족 저항운동이 발생하여 1911년 분할령을 철회하였다.
8.암리차르 학살
1919년 식민지 인도 펀자브 암리차르에서 영국군이 시위대에 발포하여 약1,500명 사망, 1,200명 부상당한 사건
9.인도-파키스탄 분쟁
식민통치를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민족 종교갈등을 조장하고 민족과 종교를 고려하지 않고 인도-파키스탄을 분할함으로써 양국간 전쟁을 유발하게 만들었다. 이로 인해 현재까지 인도와 파키스탄은 서로 적대 관계에 있으면 카슈미르지역은 여전히 분쟁지역으로 남아 있다.
10.벵골대기근
1943년 식민지 벵골지역에 흉년과 홍수로 벵골대기근이 발생했는데도 당시 처칠수상이 이를 방치하여 벵골지역민 700만명이 굶어죽었다. 당시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이 식량을 지원하겠다고 하였으나 영국이 이를 거절하여 국제적 비난을 받았다. 영국은 이에 대해 궁색한 변명만 늘어 놓았다.
11.파슈툰족 민족 분할
1893년 영국은 듀랜드라인 협정을 통해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간의 국경선을 설치하여 퍄슈툰족을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양쪽으로 갈라 놓았다. 현재도 파키스탄에 사는 파슈툰족들은 펀자브인들로 이루어진 파키스탄 중앙정부의 통치를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12.미얀마 내전과 민족갈등의 원인 제공
영국은 미얀마를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민족간 갈등을 이용하였다. 소수민족들을 우대하여 다수족인 버마족과 대립하도록 만들었다. 영국 식민지 시절 민족을 이용한 분할통치는 오늘날 미얀마 내전과 민족 갈등의 원인이 되었다.
13.유대인-아랍인간의 이중 계약
1915년 맥마흔-후세인 각서로 팔레스타인 독립을 약속을 하고 1917년 벨푸어선언으로 유대인에게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국가 건설을 약속했다. 이런 이중계약으로 4차례에 걸친 중동전쟁과 지금까지도 끊임없는 전쟁과 분쟁이 이어지고 있다.
14.쿠르드족 대학살
1920년 독립을 요구하는 쿠르드족에게 당시 장관이었던 처칠이 독가스 사용 명령하고 무차별 주민 소개와 마을 파괴로 20만명이 희생되었다. 후에 쿠르드족 독립을 약속하고도 이행하지 않았다.
15.아프리카 분할
19세기말 영국과 프랑스의 취향대로 해당 국가의 의견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국경선을 긋는 바람에 지금도 민족 종교분쟁이 끊이지 않는 헬아프리카로 전락시켰다.
16.케냐 독립운동 탄압
영국은 케냐 식민통치 시절 가혹행위와 여성들에 대한 성폭행을 자행했다. 영국 정부는 케냐의 독립운동에 차질을 준 이러한 가혹행위를 공식적으로 사과했다.
17.오스만제국 전함 먹튀사건
영국이 오스만제국에 판매한 전함 2척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당시 영국 수상 처칠이 못주겠다고 버티면서 먹튀하였다. 이것이 오스만제국이 독일편을 드는 계기가 되었다.
18.호주 원주민 인종청소
영국은 오스트레일리아에 이주하면서 태즈메이니아를 철저히 유린하였다. 태즈메이니아인 아이는 유괴하여 노예로 만들고, 여자는 납치하여 첩으로 만들었고, 남자들은 손발을 절단하여 죽였다. 결국 태즈메이니아인은 지구상에서 사라졌다. 영국은 식민지 원주민들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인간과 유인원의 중간쯤 되는 인종으로 보았다.
19.뮌헨협정으로 체코 영토를 독일에게 할양
1938년 영국은 나치독일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하여 체코의 영토 일부를 독일에게 넘겨주었다. 이 협정은 일명 서구의 배신이라 부른다.
20.카이로선언
한국을 일본으로부터 장제스는 무조건 독립을, 루스벨트는 가능한 한 이른 시일내 독립을 주장한데 반해 처칠은 한국의 독립을 반대했다.
21.드레스덴 폭격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연합국은 독일 동부의 유서깊은 도시 드레스덴을 폭격했다. 미공군은 철도시설에 집중 폭격한 반면 영국 공군은 민간인 거주지역인 도심을 정조준했다. 하룻밤 사이에 무려 2,600톤이 넘는 폭탄을 투하 3만5천여명을 사망자를 냈다. 소이탄을 마구잡이로 투하한 결과 시체조차 찾을 수 없었다.
22.프랑스 배신
독일이 프랑스를 침공하자 영국에 도움을 청하러 온 프랑스 함대를 급습하여 모조리 격침시키고 공습한 사건. 후에 영국이 프랑스에 사과했다.
23.언싱키블작전으로 미국을 배신
영국 수상 처칠은 2차대전에서 독일이 항복하자 곧바로 독일과 손잡고 소련과의 전쟁을 시도했다. 이것은 태평양 전쟁에서 소련의 참전을 요구하는 미국의 의도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행동이었다. 다행히 이 작전은 실행되지 않았다.
24.바하마의 해적 소굴
영국은 바하마를 공격해 프랑스와 스페인 함대를 쫒아내고 해적 소굴로 만들었다.
25.벨리즈-과테말라 국경 분쟁
과거 영국의 불완전한 국경 문제 해결로 현재도 두 나라간에 영토분쟁이 진행중이다.
26.키프로스 분단과 분쟁
영국이 지배하던 키프로스에 그리스계 주민과 튀르키예 주민간의 갈등을 영국이 제대로 해결하지 않은 채 발을 빼는 바람에 키프로스는 분단되었고 현재까지도 분쟁이 이어지고 있다.
27.세네갈 감비아 국가 분할
세네갈과 감비아는 원래 한 나라였으나 세네갈은 프랑스가 감비아는 영국이 감비아강의 양안을 따라 좁은 띠 모양을 지배하여 그대로 영토로 남게 되었으며, 세네갈에 거의 완전히 둘러싸이게 되었다. 이는 감비아와 세네갈 모두에게 "부자연스러운 지리"를 만들어냈으며 이러한 분할은 독립 이후 두 국가 간의 국경 분쟁, 경제적 긴장, 그리고 간헐적인 정치적 갈등으로 이어지는 지속적인 과제를 남겼다.
28.러시아-우크라이나 평화협정 방해
영국은 최근까지도 남의 나라 전쟁에 끼어들어 평화협정을 방해했다. 22.2.24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후, 22.4.15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크림반도만 러시아에 넘기고 내전중인 도네츠크주와 루간스크주는 양국 지도자의 협상을 통해 자치권 보장 등 운명에 맡기기로 하고 평화협정에 서명하기로 하였으나 영국의 보리스 존슨총리가 우크라이나까지 날아가서 우리가 도와줄테니 협정에 서명하지 말라고 방해해서 평화협정을 깼다. 그래서 전쟁이 지금까지 장기화 되었고, 이 전쟁으로 인해 엄청난 경제적 피해와 수백만명의 인명 피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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