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저런 이야기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이다 본문
1. 유기체가 성과 바꾼 것이 죽음이다
죽음이란 유기체의 생물학적 생명 활동이 완전히 끝나는 것을 말한다. 죽음은 생명 있는 것들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이 세상에 변화하지 않고 영원히 존재하는 것은 없다. 철학이나 종교에서는 육체와 영혼의 분리를 죽음으로 정의하기도 한다. 플라톤은 죽음을 영혼의 해방으로 보았고, 셸리 케이건은 죽음을 이성과 논리로 접근해 삶의 의미를 성찰할 기회로 제시한다.
우리가 생존하는 것은 자기 생명을 내어 놓는 세포들 덕분이다. 단세포 안에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가장 단순한 집합체에서는 죽음이란 무의미한 개념일 뿐이다. 유기체는 암수로 성이 나뉨으로써 죽음이란 것이 생겼다. 육체가 性의 대가로 지불해야 했던 것은 바로 죽음이다. 그리하여 유기체는 불멸을 상실하고 개체성을 얻었다. 죽음은 이미 생명의 프로그램 속에 짜여 있다. 이렇게 성을 얻고 죽음을 택한 이유는 무성생식보다 유성생식이 종족의 진화에 훨씬 유리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2. 우리는 죽음의 관념을 두려워한다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 그 자체가 아니라 죽음의 관념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죽음이란 단어만 들어도 두렵고 공포스러워 죽음을 관념적으로도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진화 과정에서 박테리아가 생식을 고안해낸 바로 그 순간부터 모든 개체는 죽음을 선고받아 왔다. 사고 과정이 단순한 동물들은 동료의 죽음에 대해 무관심하다.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도 미리 걱정하거나 불안해하지 않는다. 죽음의 순간에 그저 살고자 하는 생존 본능의 생물학적인 반응을 보일 뿐이다. 오직 인간만이 이 사형선고를 알고 두려움을 느끼고, 근심하고, 낙담하고, 무언가를 바라고, 고통스러워하며 두려워한다.
죽음의 두려움에 대한 유일한 방어책은 초월이다. 우리의 의식이 우주 의식 수준에 도달하면 거기에는 이미 삶과 죽음의 경계선이 없다. 만일 그대가 어떠한 것도 소유하고 있지 않다면 또한 그대의 순수성과 영혼이 어떠한 것에 의해서도 더럽혀지지 않았다면 그대가 거기 홀로 있을 뿐이라면 그대는 어느 순간에라도 사라질 수 있다. 자신이 평생 일궈온 부라든지 명성이라든지 권력에 대한 집착을 완전히 내려놓을 때, 더 이상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지고 언제든지 떠날 준비가 되어 있을 때 죽음은 더 이상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다.
3. 마디 맺음과 이별의 슬픔
한 인간이 생애에 걸쳐 학교를 졸업하고 군복무로부터 제대하고 직장에서 퇴직하는 것은 한 단락의 마디맺음이다. 죽음이란 것도 한 생애의 삶에 대한 종결을 뜻하는 이별이자 마지막 마디맺음이다. 이별의 슬픔 뒤에는 새로운 시작에 대한 희망이 있다. 죽음이 두려운 것은 이별 뒤의 새로운 희망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저 암흑 속으로 들어가는 불안과 공포만이 엄습해 온다. 사랑하는 가족들과의 이별, 정다운 친구들과의 헤어짐, 이 세상으로부터의 단절, 다시 돌아올 수 없다는 절망, 이 모든 것이 죽음을 두렵게 하고 슬프게 한다.
송아지가 어느 정도 자라서 시장으로 팔려나갈 때, 어미 곁을 떠나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송아지를 보고 어미 소는 온몸으로 바둥대며 울부짖는다. 새끼가 눈에 보이지 않게 되자 어미 소는 사흘 밤낮을 울어댔다.
사랑하는 것과의 영영 이별은 애간장을 끊는 슬픔을 안겨준다. 자식의 죽음은 평생 부모의 가슴에 남아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고귀한 희생도 이별의 슬픔이 죽음보다도 크기 때문이다. 갑작스러운 이별은 큰 슬픔을 가져온다. 충분히 준비된 이별은 덜 아프다. 떠나는 자나 남은 자나 아프지 않게 언젠가 찾아올 이별을 준비하자. 철학자 강신주 박사는 너의 죽음이 가장 슬프다고 했다. 그들의 죽음은 연민의 정을 느낄지언정 그렇게 슬프지 않다. 나의 죽음 또한 잠깐의 고통이 있긴 하겠지만 정작 그렇게 슬프지 않다. 오로지 너의 죽음만이 나를 고통스럽게 하고 나를 슬프게 한다고 했다.
4.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이다
죽음이란 삶의 한 과정이며 삶 또한 죽음의 한 과정이다. 만물은 스스로 변화하며 여러 모습으로 바꾸어 가면서 자신에게 알맞게 진화해 간다.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필요에 따라 이쪽도 나오고 저쪽도 나온다. 사라짐과 살아남이 반복된다. 따라서 삶이 전부고 죽음이 무가 아니다. 저세상도 또한 세상인 것이다.
죽음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은 삶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오염된 마음은 자신의 죽음을 결코 생각지 못한다. 죽음이 추하게 여겨지는 것은 그대가 한 번도 옳게 살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열정적으로 살아온 사람은 죽음도 역시 아름답다.
5. 죽음은 새로운 시작이다
죽음은 적극적인 자기방어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 온 목적은 우리의 영혼의 진화를 위해서이다. 육체는 우리의 영혼을 담는 그릇으로써, 우리의 영혼을 진화시키는 데 필요한 도구로서 대단히 중요하다. 우리의 육체가 낡아 더 이상 영혼의 진화를 위한 도구로써 활용할 수 없을 때 영혼은 새로운 시작을 위해 지금까지 사용해 오던 육체를 버리는 것이다. 이것이 죽음이다. 이 우주에서 아무 이유 없이 사라지는 것은 없다. 다만 변화해 갈 뿐이다. 다시 태어날 때는 영혼은 필요에 의해 또는 살아온 그 자신의 과거의 업장에 의해 짜여진 설계대로 새로운 육체를 찾아 들어간다. 누구도 이 카르마의 법칙을 벗어날 수 없다.
크리슈나무르티는 반복적인 패턴 속에서 지속되는 모든 것은 타락한다고 했다. 죽음은 신비로운 것일 뿐만 아니라, 위대한 정화작용이라고도 했다. 그래서 과거 카르마의 찌꺼기를 정화하고 더 나은 진화를 위해 죽음을 통해 새로 시작하는 것이다. 영혼은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에도 있으며 미래에도 존재할 것이다. 죽음은 우리의 생의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생을 위한 시작일 뿐이다. 삶이란 본래의 근원에 대한 망각이며 죽음은 본래의 근원에 대한 기억이다. 삶은 본래의 근원으로부터 멀어져 감이며 죽음은 집으로의 회귀이다.
죽음의 사자가 당신 집 문을 두드릴 때 당신은 그에게 무엇을 바치겠습니까. 나는 내 생명이 가득 담긴 바구니를 그 손님 앞에 내어 놓겠습니다. 나는 그를 빈손으로 보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타고르)
'이런저런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나의 감정이 나의 현실을 창조한다 (3) | 2025.08.09 |
|---|---|
| 세상은 내가 보고자 하는대로 보인다 (3) | 2025.06.11 |
| 내 고향 출렁다리의 추억 (2) | 2025.06.02 |
| 대홍수로 사라진 마을 세 곳 (5) | 2025.05.31 |
| 일 년 중 낮과 밤의 길이가 같은 날은 언제일까? (0) | 2025.05.29 |
| 우주에는 오로지 나만이 존재한다 (4) | 2025.05.27 |
| 절대선과 절대악은 없다 (1) | 2025.05.25 |